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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리 순국선열 6위, 105년 만에 국립묘지로 모신다
  • 이창운 기자
  • 등록 2024-06-08 02: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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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화성 고주리 만세운동 참여, 일제에 죽임 당한 김흥열 일가 유해 6위
  • 6월 7일 묘소 개장, 8일~9일 추모기간 거쳐 10일 합동 봉송식 후 대전현충원 안장

고주리 순국선열 합동묘역(이미지=국가보훈부)

국가보훈부는 1919년 경기도 화성 발안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한 뒤, 화성 고주리에서 일제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되어 순국한 독립유공자 김흥열 지사(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일가 6위의 유해를 순국 105년 만에 국립묘지로 이장한다고 밝혔다.


국립묘지 이장 순국선열은 김흥열 지사를 비롯해 동생 김성열, 김세열, 그리고 조카 김흥복, 김주남, 김주업 지사 등 6위(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로, 모두 천도교인들이다. 김흥열은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안상용, 안진순, 안봉순, 김덕용, 강태성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동생과 조카 등 온 가족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만세운동에는 1천여 명이 참여했으며, 일본 경찰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사망한 것을 계기로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대량으로 증파된 후 보복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군중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연행하여 고문을 가했다. 


특히, 4월 15일 일본군 20여 명이 제암리에 도착 후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하였고, 출입문과 창문을 잠근 채 집중사격을 가했다. 이에 23명이 현장에서 죽임을 당했고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교회에 불을 질렀다.


일제 군경은 제암리 사건 후, 근처의 고주리로 이동하여 김주업의 결혼식을 위해 모였던 김흥열 등 일가족 6명을 칼로 죽이고 시체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통정대부(정3품)를 지냈던 김흥열의 아버지와 김주업의 새신부까지 죽게 되는 등 멸문의 위기에 처해졌다. 


고주리 주민들은 불태워진 김흥열 일가 6위의 유해를 수습하여 현재 위치한 팔탄면 공설묘지에 안장하였으며, 그간 유족과 천도교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매년 4월 15일 추모제를 거행해 왔다.


국가보훈부는 올해 3월 유족대표(장손 김연목)와 협의하여 국립묘지 이장을 결정했다. 이는 그동안 국립묘지 이장에 대한 유족 간 의견 일치가 되지 않았으나, 합동 묘소를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하는 절차를 협의하던 중 유족의 의견 일치가 이뤄지며 성사됐다. 이에 따라 국가보훈부는 6월 7일(금) 오전, 묘소를 개장해 유골을 수습한 후 함백산 메모리얼 파크에서 화장한 다음 유해를 임시 안치할 예정이다. 


국가보훈부와 화성시는 6월 8일(토)과 9일(일) 양일간, 화성시 독립운동기념관 내에 고주리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 제단을 설치하고 시민들이 헌화와 추모의 글을 남길 수 있도록 추모 기간을 운영할 계획이다. 


추모 기간이 끝나면 6월 10일, 화성시 독립운동기념관에서 국가보훈부 장관, 화성시장, 광복회원, 학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고주리 순국선열 합동 봉송식을 거행한다.


봉송식 후 영현 6위를 국방부 의장병이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운구하여 독립유공자 제7묘역에 안장할 예정이다.



< 고주리 순국선열(6위) 주요공적 >


천도교(天道敎)인으로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안상용, 안진순, 안봉순, 김덕용, 강태성 등과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음


이날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는데, 마침내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3명이 부상하였음


이에 분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고, 많은 일본인 거주자들도 부상을 당함


이렇게 되자, 수원에서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대량으로 증파되어, 보복적으로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수원경찰서로 연행되어 고문당하였으나, 곧 석방되었고 그 후에도 제암리(堤岩里) 일대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게 됨


4월 15일 오후 2시경 유전준부(有田俊夫)라는 일본군 중위가 인솔한 20여 명의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민간인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천도교인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하였고 유전준부는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했음


이같은 만행으로 23명이 현장에서 죽었는데, 일제는 그들의 학살만행 현장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서슴치 않았음


일제 군경은 다시 근처의 고주리(高州里) 마을로 달려가 천도교도였던 김흥열과 일가 등 6명을 칼로 죽이고 시체를 불지르는 만행을 저질렀음


그 뿐만 아니라 그들 광견(狂犬) 같은 무리들은 제암리 일대의 집을 거의 불질러 유족들은 어린아이를 안고 노숙하였음


이같은 일제의 만행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여, 4월 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 W. Schofield)는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어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보내기도 하였음


또한 일부 양식있는 일본인들조차 분격케 하여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은 학살사진과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여 상세히 보도하였음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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